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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토전생[穢土転生] - 4 : 크리스토프 베르트랑
예토전생[穢土転生] - 4 : 크리스토프 베르트랑
  • 노승주 객원 기자
  • 승인 2019.01.28 18:35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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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ophe Bertrand ⓒPascale srebnicki

크리스토프 베르트랑, 그는 누구인가?

사실 이 질문에 답하는 것 자체는 굉장히 쉬운 일이다. 1981년 프랑스에서 태어났고, 스트라스부르 음악원을 나왔으며, 1998년 데뷔작 strofa를 시작으로 십수년간 다수의 훌륭한 작품을 발표하다 2010년 서른 살의 나이로 요절한 사람. 그를 대략 설명해보면 이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이 같은 사실의 편린들 속에서는 크리스토프 베르트랑이라는 사람의 존재가 뚜렷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왜일까? 그것은 저 짧은 약력 속에 우리가 미처 짚고 넘어가지 못한 피맺힌 번민의 흔적들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던진 질문은 그 번민들로 하여금 감춰진 제 정체를 드러내도록 하기에는 지나치게 어설픈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실로 정확한 질문일까?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원래의 질문에서 단 두 글자를 바꾸는 것만으로 우리는 수백 배 더 의미 있는 시작점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자, 진정 올바른 질문은 이렇다.

 

크리스토프 베르트랑,

그는 누구였는가?

몇 년 전, 필자는 우연히 마이클 도허티를 만나 평소 그에게 가져왔던 몇 가지 궁금증을 해소할 기회가 있었다. '당신이 리게티의 제자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나는 당신의 음악에서 리게티의 자취를 발견하기가 어렵다. 리게티의 제자라는 사실이 당신에게는 어떤 의미냐.'라는 필자의 질문에 도허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리게티는 자기 제자들에게 각자가 나고 자란 땅에서 음악을 퍼 올려낼 것을 요구했다.'라 답했다.

나는 이것을 현대음악계의 특정 시점에 존재했던 어떤 흐름을 표상하는 말로 이해한다. 리게티가 본격적으로 제자를 키워내던 70~80년대, 다름슈타트의 쇠락과 함께 외부에서 다양한 문화적 세포들이 유입되며 서유럽 현대음악계는 어떤 학파나 경향이 존재한다고 말하기 어려운 극도로 혼잡한 상황으로 접어들었다. 이같은 형국에서 작곡가들은 저마다 그 혼란을 개인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자기만의 방식을 찾아 나갔는데,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두드러진 전략이 바로 민족적, 지역적 유산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작곡가들의 출신 국가에 따라 이 전략을 활용하는 방식은 뚜렷한 개성을 보였다. 일본 작곡가들은 자기네 전통음악의 주법적 특성을 서양악기에 결합시켰고 북유럽 작곡가들은 민속적 정서의 선율이나 대자연의 심상으로부터 나온 웅대한 오케스트레이션 등을 곡에 접목시켰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제라르 뻬송, 파스칼 뒤사팽, 크리스토프 베르트랑 등을 위시한 프랑스 작곡가들의 방식이 가장 재미있을 것이다. 특유의 문화적 우월감에 기초한 아카데미즘을 음악이라는 영역에서도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선 프랑스 현대음악계의 흐름을 연대기적으로 따라 가볼 필요가 있다.

처음 전위음악계에 중요한 인물로 떠오른 프랑스인으로 우선은 에드가 바레즈를 꼽을 수 있겠으나 그는 작곡가로서 일생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냈으니 그 영광은 피에르 불레즈에게 돌리는 것이 좋겠다. 물론 피에르 불레즈의 음악을 프랑스 아카데미즘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선 논란이 많다. 그러나 그는 포레, 드뷔시, 라벨 등 전통적으로 프랑스 음악인들의 등용문이었던 파리 음악원을 졸업했으며 이후 프랑스 음악 아카데미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이르캄, 앙상블 앵태르콩탕포랭등의 창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도나우싱엔 음악제의 공식적인 창립자이기도 하다. 그는 메시앙의 제자이자 프랑스인으로서 유럽 전역에서 활동하며 총렬주의를 위시한 현학적 전위음악을 주장한 아방가르드의 수호자다.

피에르 불레즈가 국제적 아방가르드의 수장으로서 프랑스 음악계에 전위음악의 전통을 확고히 세웠다면 그 다음 세대를 대표하는 작곡가 중 한 명인 파스칼 뒤사팽은 그와 같은 관념론적 흐름과는 다소 거리를 두며 프랑스적 멜랑콜리에 기초한 음악을 쓴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피에르 불레즈와는 전혀 다른 그의 경력은 그 자체로 세대의 변화를 보여준다. 그는 한때 재즈피아니스트였으며, 피에르 불레즈처럼 지휘자를 겸하지 않았고, 조직이나 기관에 소속된 적은 있어도 자신이 직접 무언가를 창립한 적은 없다. 뿐만 아니라 그는 파리 음악원의 정식 학생이 아닌 청강생 신분으로 수업을 들었기에 공식적으로 음악원 졸업 기록이 없다.

피에르 불레즈를 아방가르드의 기둥, 파스칼 뒤사팽을 아방가르드의 반대자로 각각 비유한다면 크리스토프 베르트랑은 아방가르드 이후의 현대음악 작곡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그는 경력 면에서도 앞선 자신의 선배들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피에르 불레즈는 학생, 파스칼 뒤사팽은 청강생으로 조금씩이라도 프랑스의 최고 음악 교육기관인 파리 음악원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스트라스부르 지역 음악원을 졸업한 게 학력의 전부로 지역 음악원에서 기초를 배우고 재능있는 학생들은 파리음악원에 가서 더욱 고등한 교육을 받는 게 일반적인 프랑스 음악계의 특성상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리게티를 제외한 모든 현대음악을 극도로 싫어하는 현대 음악가로 알려졌다. 음악원 재학시절까지 그는 모차르트 베토벤 이후의 음악을 듣지 않았으며 심지어 드뷔시의 음악조차 거북하게 생각했다. 작곡가로 성공한 이후에도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를 꼽으라 하면 당대나 근대의 음악가가 아닌 브루크너를 꼽을 정도였다.

그의 음악은 실로 센세이셔널 했다. 미니멀리즘도, 구체음악도, 뉴 컴플렉시티도 아닌, 그 모든 테마들을 현란하게 내리치는 음의 폭우 속에 껴안아 버린 듯한 그의 음악은 비평가들과 청중들에게 신선한 충격과 함께 말 그대로 두려운 느낌을 갖게 했다. 그의 음악에 자주 붙여지곤 하는 수식어가 바로 '조각 같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작품들을 들어보면 대규모 오케스트라 작품이든 소규모 실내악 작품이든 아주 엄격한 형식미 속에서 반복과 변화를 만들어나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형식미가 있다는 것이 그가 그의 음악을 액자 속에 담아버렸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의 음악을 들어보면 바로 알 수 있겠지만 그 치밀한 음과 시간의 밀고 당김의 기저에는 인간의 것이라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강렬한 에너지가 흐르고 있다. 형식이란 본디 억압적인 것, 그는 그 에너지를 형식이라는 억압과의 끊임없는 긴장 관계 속으로 밀어붙이며 하나의 시한폭탄 같은 음악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2010년 돌연 자살했다. 마지막 작품인 Ayas를 만든 지 불과 몇 달 뒤였으며 3~4곡 정도의 작품을 진행 중이던 상황이었다.

젊은 나이에 죽은 예술가들은 자신의 화려한 전성기의 커리어를 망칠 기회를 갖지 못했기에 쉽게 영웅화되기 마련이다. 더욱이 그처럼 30대가 되기 전에, 즉 작곡가로서 본격적인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이전에 죽은 작곡가들은 더 그렇다. 그가 죽자마자 르 몽드지에서 그의 삶을 특집 기사로 다루었으며 음악계의 유명인사들이 애도를 보냈다. 그의 자살 이유는 양극성 장애라는 병명으로 비교적 간단하게 알려졌으되 그의 음악은 더 자주 연주되고 더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정작 어떤 생각을 하면서 죽었는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선 그 어디에서도 깊이 있는 고찰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지적해야겠다. 그의 자살 이유는 앞서 말했듯 양극성 장애, 즉 조울증이다. 조울증은 극도로 하이텐션이 되는 조증과 극도의 무기력 상태인 울증이 반복적으로 교차되는 병, 조울증 환자들은 대개 이같은 감정적 혼란 속에서 극도의 자아 불안을 겪는다고 한다. 베르트랑을 죽인 것은 요컨데 불안인 셈이다.

그의 불안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선 앞서 살펴본 프랑스 음악계의 짤막한 연대기를 다시 한번, 그러나 조금 다른 각도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를 프랑스 음악계 신세대의 대표로 만들어준 요인들과 그의 불안의 정체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요인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나면 우리는 한 명의 작곡가로서 베르트랑이 지녔을 부담의 무게와 고통을 가늠해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우선 피에르 불레즈를 보자, 그는 도나우싱엔 음악제의 창설자이자 다름슈타트 음악제의 강사로서 아방가르드라는 이념의 리더 중 한사람으로 살았다. 고전 예술이라는 신화적 이념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난 아방가르드 운동, 신화에 대한 저항 수단은 당연히 이성일 수밖에 없었고 아방가르드 음악이 총렬주의, 구조주의의 지적이고 현학적인 음악으로 귀결되는 것은 당연했다. 메시앙 클래스에서 분석의 천재라는 평가를 받고 작곡을 하는 틈틈이 취미로 지휘를 하여 거장의 위치에 오를 정도로 탁월한 지적 능력과 음악성을 가졌던 피에르 불레즈가 이같은 음악계의 흐름에서 선두적 역할을 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가 50년대에 만든 극도로 지적이고 관념적인 총렬주의 작품들은 아방가르드 미학의 음악적 표현으로 찬사를 받았다.

아방가르드를 위시한 이성 중심의 예술적 움직임이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그 체계가 점차 권력화되어감에 따라 그에 반대하는 또 다른 저항이 일어나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신화적 독점에 대한 저항이 이성적 분석을 통한 폭로였다면 이성적 독단에 대한 저항은 감성으로의 회귀일 수밖에, 포스트 모던의 흐름은 그래서 구조와 체계의 엄밀성을 지양하고 인간의 내밀한 본성으로부터 비롯된 깊은 음악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와 같은 조류의 첨단에 있는 이중 한 명이 바로 파스칼 뒤사팽이었을 것이다. 음악의 전체 구성은 물론이요 각 요소 하나까지 사전 설계하여 작곡했던 불레즈와는 180도 다르게 파스칼 뒤사팽은 그 무엇도 사전 기획하지 않은 채 그저 한마디 한마디 음악을 작곡했다. 그렇기에 일견 극도로 허술해 보이는 그 외견상의 구조 아래에서, 극도로 치밀하게 전개되는 내적 필연성을 청자들은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베르트랑의 절망은 여기에서 나온 것 일터다. 그의 시대에 이르러 아방가르드와의 유착도, 그에 대한 저항도 이젠 모두 구세대의 것이 되었다. 신화도, 이성도, 감각도 물리치고 나면 더이상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더이상 무엇에 저항해야 할 것이며 무엇을 추구하며 작품을 만들어야 할 것인가? 몇 해 전, 한 남극 탐험대원의 수기를 읽은 적이 있다. 남극과 같은 환경에서 조난당했을때 그가 추천하는 생존전략, 그것은 바로 일단 멈추지 않는 것이다. 설사 잘못된 길이라 할지라도 일단 걸어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으니까, 그리고 어디로든 가다 보면 끝에 도달하게 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예술엔 정답이 없는 것처럼 끝도 없다. 칠흑과 같은 어둠 속에서 이념의 빛이 비치지 않는다면 한 명의 예술가는 과연 어디까지 용기를 내어 발걸음을 재촉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군분투했다. 남극에서 믿을 것은 튼튼한 내 두 다리와 앞으로 나가고자 하는 의지뿐, 그가 무기로 선택한 것은 '육체성에 대한 철저한 탐구'와 '집중된 에너지', '치밀함' 이었다. 12명의 솔리스트를 위한 작품 kamenaia에서 그가 선택한 피에르 장 주브의 텍스트는 육체성이라는 주제에 대한 그의 관심을 잘 보여준다. 원본에서 몇 단락을 발췌 번역해 소개한다.

Si je suis dans ton cœur ecoute mes pensers

(내가 당신의 마음속에 있다면 나의 생각을 들어라)

Que ta main soit belle ta main droite

(너의 손은 아름다우리, 너의 오른손)

Que ton sein soit blanc bleute irise de jaune, ton cœur gauche

(너의 가슴은 푸르스름한 흰색, 무지갯빛 노란색이리, 너의 왼 가슴)

...중략

 

Que ton dos s'acheve en montagnes triomphantes

(너의 등이 승리의 산봉우리에서 끝나길)

Par dela les vallees sans crainte

(두렴 없이 그 계곡 너머에서)

Que la gravite de ta voix soit l'echo de l'odeur secrete

(네 목소리의 중력은 그 은밀한 향기의 뫼울림이리)

...후략

그는 육체성과 감각에 발을 맞대고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며 곡을 썼다. 그에게 찾아온 언론과 평단의 빠른 주목은 그의 노력에 대한 인정으로 해석해도 될 것이다. "나는 청중과 그들의 즐거움을 위해 작곡을 한다. 그러나 절대 그들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그 말처럼 그의 음악은 말 그대로 '현기증(vertigo)'이 날 정도로 겹겹이 쌓여진 레이어들의 복잡한 구조가 끝없는 긴장을 만들어내는 형태로 특징지어진다. 성부 간의 시간차로 인해 발생하는 딜레이, 끊임없이 협화를 향해 짜 맞춰져 가는 소리의 폭우, 그의 음악적 특성은 이성우위의 구조주의와 감각적 색채주의를 그만의 방식으로 결합한 감각적 구조주의라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거대한 국가를 독재자 한 명의 의지력으로 통치하는 게 불가능하듯, 치밀함과 집중력을 재료로 한 그의 음악적 동력은 언젠간 소진될 것이 명백했다. 그렇기에 그 역시 자신만의 체계를 찾는 것에 깊히 몰두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개인성이 핵심이라고 믿는다. 모든 작곡가는 자기만의 스타일로 작곡을 한다. 그중 몇몇은 진정으로 자신의 어법에 도달했다. 그러나 나는 내 스스로를 내 세대의 수많은 작곡가들의 전형 중 하나로 여긴다: 나는 나의 언어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어서 불길하게도 이렇게 말한다. "나는 가능한 한 모든 것을 바쳐 '무'에 속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예술가로서 자기 언어를 구축하는데 필요한 것은 예술적 자극을 명민하게 포착해내고 그것을 자기만의 창조적인 방식으로 재조합하는 것이리라. 많은 작곡가들이 극음악의 형태, 타 매체와의 결합, 장르 간 융합, 혹은 그를 완전히 뛰어넘는 현대성을 통하여 현대음악의 울타리를 파괴해 자기 위치를 찾아왔다. 북유럽에선 마그누스 린드베리를 꼽을 수 있겠다. 그는 자신이 만든 독특한 조성체계에 민속적 선율을 결합해 그만의 스타일을 창조했다. 일본에는 토시오 호소카와나 타카시 요시마츠 같은 이들이 있다. 이들은 방식은 다르지만 모두 일본음악의 선적인 측면을 서양 음악과 결합해 자기 길을 개척한 이들이다.

그러나 그는 끝없이 자신을 끊어내고 더 깊고 좁은 곳으로 자신을 몰아붙였다. 다른 영역으로 자신의 언어를 확장해나가기보단 끝없이 자신의 내적 세계로 침잠해 들어갔다. "오페라틱(극형식의) 작품을 쓴다는 것은 비음악가들과의 협력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대립을 인정하는 것이고 또한 작품에 대한 다른 시야를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누가 그 작품의 소유자인가? : 작곡가? 작가? 각본가? 감독? 그와 같은 작품을 만들 때, 나는 내 재산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자신을 잃어버리는 두려움을 피하기위해 낭떠러지 바로 앞에 울타리를 쳐놓고 걸어야 했던 그의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으리라.

현대적 감각을 바탕으로 근대성을 극복할 책무를 떠안았던 작곡가에게 이른 나이의 성공과 주목은 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젊은 시기에만 할 수 있는 몇몇 시도와 스타일에 집착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르 브뤼의 주창자 장 뒤뷔페의 그림과 피에르 장 주브의 시 대해 그가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은 그가 쫒았던 목표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뒤뷔페의 그림에서, 자갈 박힌 역청, 사금파리 조각, 먼지와 모래, 알갱이 같은 인상의 표현, 거침과 거침, 그에 대응되는 주브의 시는 알렉산더격 시의 균형미를 이루며 환상과 같이 섬세하고 부드럽다. 이 두 가지 다른 형태의 소재로부터 음악적 확장을 얻어낼 수 있다. (스타카토/ 레가토/ 미크로-폴리포니/ 구조주의 혹은 반음계 주의/ 온음계주의)"

그는 현대음악계의 울타리 안에서 육체성에의 침전을 통해 영적인 방식으로 현대성에 도달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육체란 본디 소진되는 것, Vertigo(2006), Scales(2008)과 같은 대규모 작품들의 연이은 성공 이후 그는 점차 소진되어가는 자기 자신을 마주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자신이 쳐놓은 울타리 안에선 더이상 그 소진을 메꿔줄 무언가를 찾을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 아닐까? 물론 실상은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나 필자는 가끔 그의 죽음을 반추하며 남극의 설원을 가로지르다 거센 눈보라에 지쳐 쓰러진 탐험가를 떠올리게 된다. 자신이 쳐놓은 울타리와 그 반대편에 있는 낭떠러지 사이에서 불안해하다가, 그는 그렇게 죽었다.

2019년이 되었다. 그가 죽은 뒤 9년의 세월이 흘렀다. 우리는 그가 마주했던 어둠에 대하여 어떠한 답을 내놓고 있을까? 그의 죽음은 분명히 무언가를 말했다. 그리고 그것을 찾아 듣는 것은 남겨진 우리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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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htor 2019-01-29 15:41:46
매번 글 잘 보고 있습니다. 글을 정말 잘 쓰셔서 매번 예토전생 시리즈 기대하고 있는 구독자(?) 입니다.

legislio3 2019-01-29 02:35:34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글의 매끄러운 흐름과 적절한 비유, 기자님의 개인적 경험이 글 속에 맞물려 읽는 내내 흥미로웠습니다.

melody 2019-01-28 20:47:50
좋은 글이네요~